검호 미야모토 무사시에 대하여...

#1 122.252.95.1782017-09-15 03:00:55

일본 무도인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갈리는 인물이긴 합니다. 말년에 니텐류와 병법 오륜서가 나왔으나 그전에 검술 유파나 고명한 스승도 없었고, 출세운도 꼬이는 낭인 검객이었죠.
일부 안티들의 루머에 편중되어 쉽게 폄하하고 마치 실존인물이 묻혀가는 형국으로 치닫고 있으나 무사시 일대기도 무조건 100% 진실도 허구도 아닙니다.
무사시뿐만 아니라 1,2위를 다투는 검성 검호의 고증도 500-600년전 일화에 후손들과 주변인에 내려오기까지 미화된 부분도 있습니다. 하나 예를 들면 검술 명가 야규가 창시자 무네요시도 텐구라는 요괴와 싸워서 머리를 베었는데 20톤짜리 바위가 반토막 났다고 했으니까요.
앞서 무네요시 세키슈사이 실력도 출중했지만, 그보다 노부나가에서 도쿠가와까지 최고 막부 쇼군을 두었던 무사로서 가장 성공한 신분의 다이묘였기에 바위베기 전설이 만들어졌고, 낭인들의 롤모델이 되었던 것도 있습니다.

안티 혹자들이 무사시를 관동지역의 타 고수들과 대결을 회피하며 도망다녔다는 일화도 정설화 되다시피 했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무사시도 일도류의 달인 이토 잇토사이를 동경했고, 관동 야규가의 명성에 존경을 표하며, 당대 1인자였던 무네요시(세키슈사이)에게 경합 서신을 수차례 보냈으나 무네요시는 회답으로
"자네의 기백을 높이 사네만 본좌가 독감이 더 심해졌는데, 다 늙은 병자와 겨뤄서 뭣하겠나? 다음에 미루세.." 라며 거절했으나 작약꽃을 보냈죠. 처음에는 의아하게 남자에게 꽃을 보내니 그 영감 변태인가?라고 했으나 무사시는 꽃봉우리 무게에 미세한 힘으로 쉽게 꺾이는 줄기 대각선의 절단면을 보고 "역시 최고였구나.." 라며 수련에 더 정진했던 계기도 있었죠. 그때는 아직 20대의 패기 넘치는 젊은 무사였고, 다음에 실력을 더 쌓고 왔을때는 이미 무네요시는 작고했다는 소식과 이후 그 아들 무네노리도 만나지 못했다고 전했습니다. 그만큼 본인의 실력을 최고에게 나아가 전국에 입증받고 싶었던 만큼 도전적인 무사정신은 강했던 인물이죠.

물론 야규가 입장에서 무사시의 뛰어난 실력을 목격하지 않아서 안타깝기도 하죠. 엄연히 다이묘이자 정치가로 전국에서 도전자나 제자로 받아주라며 찾아오고 들이대는 사무라이들이 수백명이 달하는데 명색이 도쿠가와 검술사부가 정사를 돌보며 한가로이 상대하기도 벅차고 상대해도 대학생이 갓난애기 두들기는 양학수준이 될터..미흡한 실력으로 야규 문장의 보검 카타나를 허리에 차고 출세욕이나 혹은 밥술이나 얻어먹는 허세부리는 삼류들이 분명 존재하다는걸 알고 있었기에 문파에 누가 되거나 말썽으로 귀찮음을 꺼리는 것도 있으니, 아마도 야규가문 입장은 무사시의 검술보다 그런 부류라고 여겨지는 무게를 두지 않았을까 합니다.

무사시가 검호라는 칭호를 받기까지 요시오카 가문도 관서지방에서 나름 이름깨나 있었던 한가닥 하는 칼잡이 수십명과 진검승부에서 파문 시키지 않았다면 500년이 지난 현재의 역사에 남아있을까 싶기도 하구요. 13살에 출가해서 집을 떠나 연배인 가토리 신토류를 익힌 아리마 기헤리를 시합에서 이기고, 19세부터 전투에 졸병으로 참전하고도 창검의 상흔 없이 생존했음은 무예의 기틀이 꽤 탄탄했다는 증명도 됩니다. 공식적인 진검대결 60회면 적수가 될만한 상대였으며, 도적떼나 양아치 무뢰배들이나 일삼는 타메시기리(약자를 상대로 시험삼아 베기) 양학은 아니라는것은 무도인에게도 다 알고 있는 일화입니다.

#2 ruka23722017-09-15 04:28:27

첫째로, 토론을 여실 요량이라면 정확히 어떠한 내용을 '토론'하고싶으신 것인지 분명해 해주시길 바랍니다. 이 문서의 내용이 편향되어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으로 판단되는데, 그렇다면 허구성 문단을 편집 내지 삭제하고 싶으신 것인지, 아니면 허구성에 반대하는 문단을 새로이 만들고 싶은 것인지 편집의 방향을 제시하시지 않아 토론의 발제문으로서 적합하지 않습니다.

둘째로, 말씀하시는 내용의 출처가 없으니 신뢰하기 어렵습니다. 현재 문서의 내용 역시 출처가 완벽한 것은 아니지만 '아이다 유지, <일본인의 의식구조>'나 일본 위키 등 최소한의 출처가 있는 반면 발제자분께서 말씀하신 일화는 떠도는 낭설인지, 분명한 사실로 밝혀진 것인지 판단할 근거가 없습니다.

셋째로, "아마도 야규가문 입장은 무사시의 검술보다 그런 부류라고 여겨지는 무게를 두지 않았을까 합니다.", "무사시가 검호라는 칭호를 받기까지 요시오카 가문도 관서지방에서 나름 이름깨나 있었던 한가닥 하는 칼잡이 수십명과 진검승부에서 파문 시키지 않았다면 500년이 지난 현재의 역사에 남아있을까 싶기도 하구요." 등 다소 주관적인 표현이 발제문에 다수 보이는 바, 가능한 한 이후 토론에서는 객관적인 견지를 유지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3 124.53.234.1872017-09-16 12:06:40

그렇군요